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읽었다. 대강의 내용은 알고 있었지만, 제대로 아는 척을 하기 위해서 민음사에서 출간된 ‘헤밍웨이 디 에센셜’에 수록된 <노인과 바다>를 다시 읽어보았다. 본문과 상관없는 쓸데없는 이야기지만, 민음사의 ‘디 에센셜’ 시리즈는 너무 갖고 싶게 생겼다.

<노인과 바다>는 왕년에 ‘챔피언’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힘이 아주 세고 실력이 뛰어났으나, 이제는 노인이 된 어느 어부의 이야기이다. 노인은 이제 빈곤하고 노쇠했지만, 눈빛만은 빛나고 있었다. 그에게는 자신을 아버지처럼 따르는 소년이 있었는데 그 소년은 노인을 존경하고 노인은 그 소년을 사랑했다. 예전에 노인은 꿈을 꾸면 과거의 기억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물고기와 사투를 벌이던 기억, 폭풍, 죽은 아내. 그러나 최근에는 고양이처럼 뛰어노는 사자들의 꿈을 꾸고 있다. 노인은 그 사자들을 소년만큼이나 사랑했다고 한다.(나는 이 부분이 이 이야기의 결말에 중요한 단서가 됨을 발견했다.) 노인은 80여 일째 고기잡이에 실패하고 있었다. 동료어부들과 마을 사람들은 노인을 조롱하기도 하고 안타까워하기도 한다. 그러던 중, 85일째 출항에서 노인은 거대한 청새치를 만나고 며칠간의 사투 끝에 청새치를 잡는 것에 성공한다. 거대한 물고기와 거대한 이야기를 가진 인간의 사투. 너무도 생생하고 자세한 묘사에 보는 내내 손에 땀을 쥐었다. 결국 노인이 싸움에서 승리하고 청새치를 배에 묶고 항구로 돌아가지만, 수차례에 걸친 상어들의 공격에 결국 청새치는 뼈만 남게 되고 거대한 청새치의 흔적만을 단 채로 노인은 항구에 돌아오게 된다. 

 여기까지 보면 이 이야기는 단순히 자연과 맞서는 인간의 위대함 정도로 끝날 수 있을 이야기이다. 하지만 나는 이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에서 큰 감동을 받았다.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은 노인의 꿈 이야기인데, 그 바로 앞 장면에 ‘테라스(테라스가 딸린 가게-식당, 주점쯤 될 것. 같다.)’에서 관광객과 웨이터가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있다. 

 “저게 뭐죠?” 여자가 웨이터에게 물으면서 이제 해류를 타고 바다로 밀려 나가기를 기다리는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 그 엄청나게 큰 고기의 길쭉한 등뼈를 손으로 가리켰다.

 “티뷰론(‘상어’를 뜻하는 스페인어)이죠. 상어랍니다.” 웨이터가 대답했다.

그러면서 그는 사건의 경위를 설명하려고 애를 썼다.

 “상어가 저토록 잘생기고 멋진 꼬리를 달고 있는 줄은 미처 몰랐어요.”

 “나도 몰랐는걸.” 여자와 동행인 남자가 말했다.

이 부분에 대한 해설을 찾아보니 여러 가지 의견들이 있다. 번역이 잘못되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노인이 사실 청새치가 아니라 상어를 잡아 온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 장면이 바로 뒤에 이어지는 노인의 꿈과 곁을 지키는 소년의 모습이 어우러진 위트 있고 행복한 결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인은 며칠 동안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이며 거대한 청새치를 잡아왔다. 하지만 도중에 상어들의 습격을 받아서 그가 이룬 것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우리의 삶도 그렇다.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아등바등하지만, 한순간의 실패로 모든 것을 잃게 되고 좌절하고 마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하지만 그 손님들처럼 타인은 우리의 실패 혹은 성공에 별다른 관심이 없다. 청새치든 상어든 중요하지 않다. 이야기를 전달하려고 애쓰는 웨이터의 노력도 필요 없다. 그냥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판단하고 싶은 대로 판단해 버린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타인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냥 신기한 이야기면 잠시 신기해하고, 좋은 이야기면 잠시 부러워하고, 나쁜 이야기면 잠시 비난한다. 내 인생에서 타인은 모두가 구경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타인이 무어라 생각하든 개의치 않고 자신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내면 된다. 자신이 치열하게 쌓아온 이야기는 노인의 곁을 지키는 소년처럼 자신을 알아주고 인정하는 누군가를 통해 사랑으로 보상받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노인은 몸은 비록 많이 지쳤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소년의 보살핌을 받으며 잠을 자고 있다. 소년만큼이나 사랑하는 사자들의 꿈을 꾸면서.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떤 아픔과 상처가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노인은 오늘을 치열하게 살았고, 지금 행복하고 쉬고 있다. 

나는 요즘 힘든 일상을 보내고 있다. 여러 가지 상황이 안 좋아져서 자책도 많이 하고 과거를 돌아보며 후회도 많이 하곤 하는데, 이 이야기를 읽으며 새로운 용기가 솟아남을 느낀다. 이미 지나간 과거에 매여 자책할 필요가 없다. 내일을 위해 오늘을 치열하게 살고,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행복을 누리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고, 큰 기쁨이다. 오래전 헤밍웨이의 이 작품은 오늘의 나에게 이렇게 시공을 초월한 감동을 준다. 독서는 이런 것이다. 보는 사람마다 자신의 상황과 생각에 맞게 각각 다른 해석을 찾게 되고, 각각 다른 모양의 감동을 준다. 정말 멋진 일이 아닐 수 없다.

 한 가지 이야기하고 싶은 점은, 이 작품을 더욱 빛나게 하는 ‘디테일’이다. 좋은 소설의 특징은 디테일에 있다. 눈앞에 보이듯 생생한 묘사와 소재로 삼은 대상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그 이야기에 더욱 몰입하게 만든다. <노인과 바다>는 특히, 헤밍웨이가 젊은 시절 만난 자신의 낚시 선생님들을 모델로 한 이야기이기에 자신이 직접 겪고 들은 이야기를 더욱 생생하게 옮길 수 있었다. 책상에 앉아서 검색만으로 찾아낸 어부에 대한 지식을 쓰는 것과, 직접 어부가 되고 어부인 사람들을 만나 함께 지내며 체득한 이야기는 그 생명력과 디테일을 비교할 수 없다. 그것이 헤밍웨이의 이야기가 명작으로서 오랜 시간 동안 사랑받을 수 있는 이유다. 작가는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과 상황에 대한 묘사를 구체적으로 해주고, 그로 인한 감정에 대한 설명은 최대한 지양하고 오롯이 독자의 몫으로 맡기는 것. 그것이 좋은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이런 상황에 처하다니, 주인공은 이런 마음이겠구나. 나라면 어땠을까. 이렇게 독자가 주인공의 상황에 몰입하고 생각할 수 있는 공간을 주어야 한다. 이런 문학작품은 단순히 책으로 소비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화, 드라마, 공연 등의 2차 저작물로 계속 재생산되면서 그 생명이 이어진다. 헤밍웨이의 작품과 같이 눈에 보일 것 같은 생생함이 없다면, 2차 저작물로 만들 때 참 어려울 것이다. 작가의 의도를 온전히 살리지도 못하고 이도저도 못한 이야기가 되어버릴 가능성이 크다. 원작 소설을 그대로 2차 저작물의 형태로 옮길 수 있도록 최대한 구체적이고, 추상적인 부분은 최소화해야 한다. 

헤밍웨이는 장식이나 기교 없이,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를 잘 전달하는 작가다. 글을 공부하고 글을 쓰면서 깨닫는 것은, 아주 단순한 이 진리인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를 글로 옮긴다’라는 것이 아주 어렵다는 사실이다. 보는 사람들이 이 상황을 이해 못 할 것 같은 불안함과, 내가 의도한 감정을 보는 이도 똑같이 느껴야 한다는 강박. 이런 두려움으로 작가는 친절함을 가장한 간섭을 하고, 독자는 자신의 감정을 찾고 여운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강요하는 감정 속에서 피로함을 얻는다. 독서는 온전히 독자의 몫이고, 보는 이들에 따라 각기 다른 생각과 해설이 존재하는 것이 당연한데, 작가가 스스로 모든 것을 다 설명해 버리면 독자가 즐길 수 있는 여지가 없어져 버린다. 친절한 글일지는 몰라도 아무 생명 없는 글이 되어버린다. 

나도 친절함을 가장한 구질구질한 문장만을 늘어놓는 작가가 아니라, 눈앞에서 생생하게 펄떡이는 문장을 낚아내는 작가가 되기를 다짐하며 오늘의 독후감을 마친다. 생각해 보니 치열한 하루를 마치며 감명 깊게 읽을 책에 대한 기록을 남길 수 있는 시간이 있음에 참 행복하다. 

그대의 지금 이 시간도 행복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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